‘플란다스의 개’ 네로를 위로한 루벤스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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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플란다스의 개’ 네로를 위로한 루벤스의 걸작 고통스런 삶과 죽음의 순간, 그를 부드럽게 안아줄 여인의 모습

기사입력2023-10-15 00:00

이다 미술역사가 (meundaisy@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플란다스의 개’의 한 장면과 ‘십자가의 내리심’ 관람 장면.

한여름 끝 8월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초가을 날씨의 선선함과 매일 오락가락 내리는 비로 하루에도 몇 번을 개었다가 흐렸다가 하는 하늘입니다. 폭우처럼 비가 내리다가도 어느 순간 맑게 개는 변덕스러운 하늘에서 네덜란드 풍경화 속 아름다운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바다보다 육지가 낮아 운하가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멋진 풍경이지만 야트막한 산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땅과 하늘이 전부인 네덜란드의 풍경 끝에서 만나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미술여행을 가면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앞에는 여느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조각상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어린아이와 개가 잠든 모습이죠. 벨기에 공무원 얀 코르텔(Jan Corteel)이 자국민도 모르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일본인 관광객을 통해 알게 되고 루벤스의 도시에 네로와 파트라슈의 도시라는 브랜드를 추가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조각상은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을 기념합니다.

어릴 적 즐겨보던 TV 만화 ‘플란다스의 개’는 어른들의 편견과 부당한 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았던 네로와 파트라슈의 이야기로 벨기에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동화를 각색한 일본만화입니다. 할아버지와 우유 배달을 하며, 강아지 파트라슈와 함께 사는 소년 네로의 꿈은 화가였습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죽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술대회에서 떨어진 네로가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었던 대성당의 그림을 보기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당을 찾습니다. 크리스마스에만 무료로 볼 수 있는 그림을 보게 된 네로는 아름다운 작품을 보게 된 기쁨과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며 추위와 굶주림으로 파트라슈와 함께 죽어갑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Onze-Lieve-Vrouwekathedraal) 광장에 있는 ‘네로와 파트라슈’ 조각상.

슬픈 결말이지만 귓가에 맴도는 경쾌한 주제가가 슬픈 이야기를 위로하는 듯합니다. 성당의 추위 속에서 네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그림은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리심’입니다. 18세기까지 플랑드르 지역이라 불리던 이곳은 플랑드르 미술 바로크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곳으로 루벤스의 도시라 불립니다.

플랑드르 미술은 1400년대 남부 도시 브뤼헤와 헨트, 브뤼셀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1500년대부터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1556년 즉위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속국이었던 이 지역을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했는데, 살벌한 정권 아래에서 자유를 잃은 예술가들이 북부인 지금의 네덜란드로 떠나면서 이곳은 한동안 미술이 쇠퇴했습니다.

가족과 독일로 떠났던 루벤스는 1589년 12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안트베르펜에 돌아옵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진 그는 네로처럼 화가를 꿈꾸었고, 안트베르펜을 다시 바로크 미술의 중심지로 부활시켰습니다. 1600년 23살에 이탈리아로 떠난 루벤스는 만토바의 곤자가 가문의 궁정 화가로 살면서 베네치아, 로마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장차 17세기 유럽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 되는 피터르 파울 루벤스는 8년간 이탈리아 미술을 배우고 사실주의 기법의 플랑드르 미술의 전통과 대담한 구성과 웅장한 이미지, 베네치아의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을 융합하는 화가로 성장합니다.

1608년 어머니의 병 때문에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을 때 루벤스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화가였습니다. 그는 안트베르펜의 대성당을 위한 제단화를 주문받습니다. 현재 대성당 왼쪽 예배당에 보관되어있는 ‘십자가에 올리심’은 원래 성 발부르기스 교회를 위한 제단화였습니다. 건장한 남자들이 그리스도를 못 받은 십자가를 밧줄로 힘겹게 잡아당겨 올립니다. 거친 근육의 남자들의 움직임은 중력이 주는 폭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하얗게 질리고 뒤틀린 채로 당겨 올라가는 몸으로 표현한 루벤스는 아마 라오콘의 뒤틀린 근육에서 영감받았을 것입니다. 3.4미터 높이의 그림 앞에 서면 육체와 정신의 고통의 극한을 보여주는 이 장면 앞에서 전율이 느껴집니다.

피터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 올리심’, 캔버스에 유화, 462×341cm, 1610~1611년,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대성당.

네로가 보았던 그림은 오른쪽 예배당에 있는 그림으로 루벤스가 1614년에 완성한 ‘십자가에서 내리심’입니다. 안트베르펜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위한 제단화로 죽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입니다. 양손과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예수의 죽은 몸이 축 처져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몸을 내리려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애절한 손은 천천히 아들의 몸으로 다가갑니다. 루벤스는 높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이 장면의 현실적인 소동과 어머니의 아픔을 예수의 몸을 감싸는 흰 천에 깊고 강한 빛 속에서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자세는 ‘십자가에 올리심’보다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들의 몸짓은 애도의 분위기를 담아 보다 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유일하게 감정의 슬픔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어머니의 몸짓으로 죽은 그리스도를 비추는 빛이 연결되는 장면이기에 우리에게 예수의 죽음을 맞이하는 슬픔과 어머니의 아픔이 함께 전달됩니다.

루벤스는 이 그림에서 ‘예수의 죽음’을 플랑드르 미술이 가진 처절하고 비통한 슬픔이 아닌 신비로운 장면으로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의 자세는 실제로 ‘십자가에 올리심’에 비해 예수 몸의 무게를 받치지 못하는 자세들입니다. 붉은 옷의 사도 요한만이 예수의 몸을 받칠 수 있는 자세이지만 이 또한 무게를 감당하지는 못하는 자세입니다. 무릎을 꿇은 금발머리의 여인이 예수의 발을 어깨에 받치고 있는 자세도 비현실적입니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의 화법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부드러움과 사람들의 우아한 자세 때문입니다.

죽은 예수의 몸은 육체적인 생명이 없으나 가벼운 영혼을 지닌 듯 신비롭게 내려옵니다. 인간적인 무게가 아닌 빛이 가득한 그곳에서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게 명상하도록 보여주려는 의도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루벤스의 그림은 고통스런 삶과 죽음의 순간, 그를 부드럽게 안아줄 여인의 모습으로 더욱 위로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성당 중앙 제단에 ‘성모 승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루벤스의 걸작 4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역동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빛과 색의 사용을 보여주는 루벤스의 초기 작품들은 고요하게 가슴뛰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이다 미술역사가, ‘인간을 탐구하는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