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시간을 통과한 감정이고, 고통이고,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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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그림은 시간을 통과한 감정이고, 고통이고, 진실 그림 앞에서 멎은 숨결…스탕달 신드롬과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기사입력2025-08-19 14:38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1817년 어느 날.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Santa Croce)에 들어선 한 남자는 갑작스러운 심장 두근거림과 함께 눈앞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주변은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예술작품들로 가득했다. 그는 감정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황홀경에 빠졌다. 마치 예술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느꼈던 남자가 바로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진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Stendhal, 본명 Marie-Henri Beyle, 1783~1842)이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여행기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Naples et Florence: Un voyage de Milan à Reggio, 1817)’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산타크로체의 현관을 나서는 순간, 맹렬한 심장 두근거림이 나를 덮쳤다. 생명의 근원이 말라버린 듯했고, 나는 쓰러질까 두려운 마음으로 간신히 발을 옮겼다.”

이 기록은 훗날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정신과 의사 그라치엘라 마게리니(Graziella Magherini)는, 피렌체의 기념비와 박물관, 미술관을 관람한 뒤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겪으면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녀는 이들의 증상이 스탕달의 여행기 속 묘사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이를 ‘스탕달 신드롬’이라 명명했다. 마게리니는 이러한 현상을 연구해 1989년에 ‘스탕달 신드롬(La sindrome di Stendhal)’을 출간했다. 이후 강렬한 예술적 경험이 신체적 반응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현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탕달,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 Delaunay: Paris, 1826. <출처=https://edition-originale.com>

◇아버지를 죽인 베아트리체 첸치=‘스탕달 신드롬’을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함께 따라오는 작품이 있다. 바로 1650년경 제작된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Ritratto di Beatrice Cenci)’이다. 이 작품이 스탕달이 신체적 반응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렬한 예술적 경험을 유발했던 대표적 예술작품 중 하나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현재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Palazzo Barberini)의 갤러리아 나치오날레 다테 안티카(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에 전시된 이 초상화는, 관람객들에게 심리적 몰입과 감정적 충격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이미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베아트리체 첸치의 비극적인 삶과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공개 처형이라는 운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감옥에서 사형을 앞둔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전해지는 이 그림은, 순수하면서도 슬픈 눈빛으로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서늘한 감동을 안긴다. 그녀의 청초한 얼굴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끔찍한 현실의 잔혹함과 그에 대한 저항의 흔적을 고요히 간직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종속 살인자다. 그러나 베아트리체 첸치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 아버지 프란체스코 첸치 백작(Francesco Cenci)에게 신체적, 성적 학대를 당해온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과 가족이 겪는 끔찍한 학대 사실을 여러 차례 당국에 알렸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당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첸치 가문의 참혹한 상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들은 백작의 권력 앞에 모두 침묵했다. 결국, 수년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1598년 9월 9일, 아편과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를 하인 두 명, 남동생, 계모와 함께 살해했다. 그리고 이를 우발적인 추락사처럼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발코니 아래로 던졌다. 처음에는 범행이 들키지 않았지만, 곧 진실이 드러났고 베아트리체는 체포되어 고문과 재판 끝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로마 시민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다. 1599년 9월 11일,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 광장에서 베아트리체의 공개 처형이 집행되던 날, 수많은 시민이 이 부당한 판결에 항의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현장에서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는 자신의 작품 ‘홀로페르네의 목을 치는 유디트(Giuditta e Oloferne, 1599~1602)’에 이 기억을 담았다고 한다. 유디트가 단호하게 칼을 휘둘러 홀로페르네의 목을 베는 이 그림은, 목이 잘려 나가는 극적인 순간의 잔혹함과 여성이 남성의 권력에 맞서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은 베아트리체의 처형을 목격한 카라바조가 느꼈던 충격과 감정을 화폭에 옮긴 결과일 것이다.

지네브라 칸토폴리,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64.5×49cm. 바르베리니 궁전의 갤러리아 나치오날레 다테 안티카, 로마. <출처=https://it.wikipedia.org>

◇남성 화가에서 여성 화가로=흥미로운 사실은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의 작가가 최근에 와서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레니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남성 화가로, 고전주의적 아름다움과 이상화를 추구한 인물화로 유명하다. 특히 이 작품은 그가 사형을 앞둔 베아트리체 첸치를 감옥에서 직접 보고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단순한 초상을 넘어 비극과 저항의 미학으로 해석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21년,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 진행한 디지털 고해상도화 프로젝트를 계기로 작품의 진위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지면서 다른 사실을 알게 됐다. 기가픽셀 수준의 초고해상도 이미지 분석과 캔버스 표면의 붓 터치, 물감의 화학적 조성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 그림이 1600년대 초에 제작된 것임이 확인되었는데, 이 시기는 레니가 로마가 아닌 볼로냐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이 작품을 직접 그렸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최근 들어 이 그림의 진짜 작가가 지네브라 칸토폴리(Ginevra Cantofoli, 1618~1672)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칸토폴리는 17세기 초 볼로냐에서 활동한 여성 화가로, 바로크 시대에 이름을 남긴 드문 여성 화가 중 한 명이다. 남성 중심의 미술계 속에서 그녀는 섬세한 감정 표현과 따뜻한 분위기의 여성 인물화로 주목받았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은 구성과 색감, 인물 묘사 방식에서 레니의 전형적인 화풍보다는 칸토폴리의 회화적 특징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디지털 스캔을 통한 물질 분석과 회화 사료 비교 연구가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그림 속 인물이 머리에 두른 터번, 측면으로 기울어진 얼굴의 구도, 그리고 깊은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눈빛 등은 칸토폴리 특유의 감정 묘사와 부드러운 여성 초상 회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현재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은 해당 작품을 칸토폴리가 그린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남성 화가에서 여성 화가로의 저자 수정은, 오랫동안 예술사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 예술가의 존재를 다시 조명하고 복원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실제로 칸토폴리의 손길이 깃든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단지 여성의 이미지를 그린 초상이 아닌, 여성 화가가 그려낸 여성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깊은 예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림은 단순히 색과 선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과한 감정이고, 고통이고, 진실이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면, 그녀의 고요한 눈빛이 숨 막히게 하고, 가슴을 조여온다. 그 눈빛 뒤에 감춰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용기는 보는 이를 붙잡아 놓아주지 않는다. 화면 속 차갑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그 이면의 서사가, 몸이 아플 정도로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스탕달이 느꼈을 감정의 격랑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