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풍경 속에서 머물며, ‘본 것’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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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사라질 풍경 속에서 머물며, ‘본 것’을 그리다 소박한 그림의 마술…이상현 작가

기사입력2023-01-04 14:39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22.08.31.-10.01.’, acrylic on canvas, 162.2cm×560.5cm, 2022

학창 시절, 나들이를 가기 좋은 계절이 될 때마다 사생대회가 열리곤 했다. 답답한 학교를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게 그림 솜씨 따위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눈앞에 놓인 자연 풍경은 너무나도 자세해서 따라 그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언제나 엉망으로 범벅이 된 물감 덩어리를 제출해야 했다. 그때는 본 것을 아름다운 형태의 그림으로 곧잘 옮겨내는 사람들이 꼭 마술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난 뒤, 미술에 대한 책을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본 것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꿔내는 기술이 경탄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런 이야기였다. 화가, 혹은 미술가는, 세계를 그림으로, 혹은 이미지로 재현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계를 더 잘 모방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잘 모방된 그림을 볼수록 의아한 점이 드러난다. 분명 세계를 그린 그림이건만, 그것은 세계 그 자체보다는 또 다른 그림을 더욱 닮아있다는 것이다. 화가는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지만, 그 대신 자신이 얽혀 있는 구조를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본 것을 그림으로 바꿔내는 기술은 곧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 속임수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22.05.02.-05.13.’, acrylic on canvas, 136.5cm×136.5cm, 2022

하지만 여전히 어떤 작가들은 본 것을 그리고자 한다. 이상현 또한 그런 종류의 작가다. 그는 붓과 물감, 그림 도구를 챙겨 들고 바깥으로 나선다. 맨눈으로 풍경을 보고, 온몸으로 머무른다. 그렇게 얻은 인상을 그림으로 빠르게 옮긴다. 이것은 꽤나 수고스러운 과정일 것이 분명하다.

작가는 특히 개발되지 않고 방치된 간척지의 풍경에 관심이 있다. 이곳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잊힌 장소이자, 개발이 시작되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일시적인 장소이다. 곧 잊힐 풍경, 사라질 풍경 속에서 머물며 이상현은 자신의 그림을 완성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본 것을 그려낸 그림은 비판의 대상이자,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옛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착오적임’을 각오하고 무언가 해내고 나면, 그때야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상현은 자신의 그리기 방법, 이른바 ‘사생’이 하나의 연습이라고 말한다. 연습은 겉으로 보이면 안 될 것, 결정적인 순간에는 숨겨져야 하는 어떤 것이다. 작가는 오히려 그것을 드러낸다. 지난 과거, 자연을 재현했던 화가들은 붙잡을 수 없는 숭고를 화폭에 옮기고자 했다. 그들은 전능한 관찰자, 혹은 미치광이 과학자였다. 그처럼 이상이 높았기에 추락 역시 가팔랐다. 하지만 이상현은 그저 연습한다. 추락할 곳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여기엔 숭고함과 웅장함이 없다고 해도, 나름의 소박한 자율성이 대신 있다. 이것은 아주 자그마한 가치처럼 보이지만, 시대착오적인 것을 과감히 시도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조금은 마술 같은 일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