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이 된 예술영화 ‘위대한 유산’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위대한 유산이 된 예술영화 ‘위대한 유산’ 예술은 변함이 없다…프란체스코 클레멘테의 하나가 되는 세계

기사입력2022-02-11 10:12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소녀는 넓은 저택 안에 있는 작은 분수대에서 허리를 굽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손으로 입을 한번 훔치곤 앞에 있는 소년에게 말한다. “마실래? 먹어도 안 죽어.”

그러자 소년은 쭈뼛대며 분수대로 다가와 분수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다. 그 순간 소녀의 입술이 물을 마시고 있는 소년의 입술로 다가온다. 소년은 소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흠칫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렇게 소년은 첫 키스를 경험한다.

1998년 개봉한 영화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이 첫 키스다. 이 장면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 정도로 싱그럽고 아름답게 촬영되었다. 영화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 소년이 유명한 화가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과 로맨스를 담고 있는 일종의 성장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린 그림은 무척 인상적인데, 사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 1952~)의 작품이다. 지금 먼지 쌓인 추억의 영화를 꺼내와 들춰본다.

‘위대한 유산’(1998) 영화의 한 장면,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의 작품.

◇‘위대한 유산’과 화가의 성장 스토리=‘위대한 유산’에는 20대의 기네스 팰트로와 에단 호크의 모습이 담겨 있다.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1990년대 후반은 참 낯설게 느껴진다. 20대였던 이 두 배우가 벌써 50대에 접어들었으니 말이다. 영화에서 ‘에스텔라’ 역을 맡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행동을 연기했던 기네스 팰트로는 무척 아름답고, ‘핀 벨’ 역을 맡아 소극적이면서도 약간의 반항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에단 호크는 청년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그들이 연기하는 사이사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의 그림은 이 영화에 잘 녹아들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졌다. 이 영화는 찰스 디킨스가 쓴 동명의 장편 고전소설 ‘위대한 유산(1861)’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다. 찰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로 여겨진다. 그의 소설 ‘위대한 유산’은 이전에도 1946년 데이비드 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비교적 최근인 2012년에 마이크 뉴얼 감독에 의해 다시 영화화되기도 했다.

1998년 개봉작 ‘위대한 유산’이 다른 점은 1946년과 2012년 영화가 원작 소설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한 반면, 1998년 영화는 원작의 큰 맥락만 가져올 뿐 전반적으로 다른 형식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래비티(2013)’와 ‘로마(2018)’ 등으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멕시코 출신의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이 제작한 이 ‘위대한 유산’은 원작 소설의 시대인 1800년대를 1980년대로, 극의 배경을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바꿨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소설 원작에서 주인공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거나 화가가 되는 내용이 없는데, 영화에서는 이 내용이 영화를 이끄는 주요한 한 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영화에서 그림은 무척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위대한 유산’(1998) 영화 포스터, 프란체스코 클레멘테가 그린 기네스 팰트로의 초상화.

영화의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가난한 고아 소년 핀 벨은 그 지역에서 부유하다고 알려진 노라 딘스무어 여사의 호화저택에서 어린 소녀 에스텔라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를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지만, 청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짝사랑하던 에스텔라가 어느 날 말없이 그의 곁을 떠나게 되면서 절망에 빠진다. 그렇게 7년이 지난 후, 핀 벨은 익명 후원자의 도움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에스텔라를 재회하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한 상황. 짧은 재회를 뒤로한 채 그녀는 떠난다. 그리고 에스텔라와 자신을 만나게 하려고 부유한 딘스무어 여사가 자신을 후원했다고 생각했던 핀 앞에 진짜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제야 핀은 자신이 누리는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알게 되고 영화는 결말을 향해 간다.

이 영화에서 핀의 그림들은 영화를 독특하고 개성 있는 분위기로 만든다. 그가 그린 물고기, 갈매기, 별 등과 같은 자연물은 독특하고 신비로우며,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그림은 모두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의 작품이다. 시종일관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던 기네스 팰트로의 연기와 순수하면서도 약간은 음울한 느낌을 주었던 에단 호크의 연기가 이 그림과 겹치면서 독특한 느낌을 지닌 영화로 완성되었다.

◇상반된 요소가 하나가 되는 세계=클레멘테는 영화 ‘위대한 유산’을 위해 200여 점의 작품을 새롭게 그렸다. 그는 회화의 전통, 즉 ‘손으로 그리는’ 그림의 형식과 서술성을 회복하자는 트랜스 아방가르드(Trans Avantgarde)를 추구했던 화가다. 수채화, 파스텔, 프레스코, 유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형이상학적 이미지와 이국의 문화적 상징을 활용한 작품을 다수 창작했다. 이탈리아 항구도시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레멘테는 로마에서 건축을 전공했지만, 미술의 매력에 빠져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고, 1980년대에 뉴욕으로 이주해 신표현주의 작가들과 함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하퍼스 바자 잡지와 ‘뮤즈로서의 모델’ 협업 프로젝트, Photo by Jason Schmidt<출처=www.harpersbazaar.com>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나의 작업은 언제나 여행과 연관되어 있다. 내가 머물렀던 장소에 있는 고유한 전통과 어떻게든 연관된다”라고 언급했는데, ‘위대한 유산’에서 보여준 작품처럼 그가 독특하고 신비로운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여행으로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도의 사상과 종교,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수천 년 전에 나폴리를 떠난 신들이 인도에서는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므로 그곳은 나에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수년 전에 느꼈던 것을 인도에서 느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는 인도의 문화적, 정신적 총체인 힌두이즘(Hinduisim)을 서양의 고전과 혼합하고, 거기에 상상력을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작품을 완성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남과 여,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과 같은 상반된 요소가 둘이 아니라 분화되기 전인 하나의 세계로 나타난다.

클레멘테는 협업 프로젝트에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미 1980년대에 장-미셀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과 함께 셋이 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아쉽게도 1984년 바스키아와 워홀이 비밀스럽게 그들만의 협업을 시작하면서 클레멘테는 빠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영화 ‘위대한 유산’과의 작업도 어떻게 보면 협업의 한 형태다. 최근인 2016년에도 그는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잡지와 협업을 진행했다. ‘뮤즈로서의 모델(Modelas Muse)’ 프로젝트인 이 협업은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델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각기 다른 나이대의 여성 모델들이 참여했고, 클레멘테는 이 모델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그려, 모델의 초상화라는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협업 프로젝트를 신비롭고 개성 있는 프로젝트가 되도록 이끌었다.

세월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위대한 유산’에서 매력적인 모습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았던 20대의 기네스 팰트로와 반항기가 어려 있던 20대의 에단 호크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클레멘테도 이제 70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예술은 변함이 없다. 영화도, 미술작품도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